스웨덴 랠리를 마친 참가자들은 아프리카 대륙 동부 케냐로 이동해 사파리 랠리를 준비했다. 케냐 사파리 랠리는 WRC 캘린더를 통틀어 가장 험난하고 예측 불가능한 이벤트다. 올해는 나이로비(Nairobi) 인근 오프닝 스테이지가 사라지고 나이바샤(Naivasha) 호수 둘레의 험난한 지형에서 대부분의 경기를 치렀다. 경기 구간과 이동 구간이 모두 줄어 전체 거리가 180km가량 짧아졌다.
사파리 랠리의 역사는 1953년, 엘리자베스 2세 여왕의 대관식을 축하하기 위한 이벤트 성격으로 시작되었다. 당시 영국의 동아프리카 식민지들을 가로지르는 수천 km의 장대한 거리를 달려야 했기 때문에 속도보다는 내구성 중심의 서바이벌에 가까웠다. 1973년 WRC의 첫 번째 캘린더부터 이름을 올렸던 사파리 랠리는 금세 핵심 이벤트로 자리 잡았다. 2002년을 마지막으로 WRC에서 사라졌지만 현지에서 명맥을 유지했고, 2021년 WRC 복귀에 성공했다.
랠리계의 변화를 받아들여 지금은 경기 구간을 350km 남짓으로 단축했지만, 여전히 캘린더 중 가장 가혹한 이벤트임은 변함이 없다. 독특한 환경 때문에 초창기에는 현지 드라이버의 강세가 두드러졌다. 홈그라운드의 셰카르 메타(Shekhar Mehta)가 5승으로 역대 최다승 기록 보유자이며, 북유럽 출신의 발데가르드(Björn Waldegård)와 칸쿠넨(Juha Kankkunen)이 그 뒤를 잇는다. 최근에는 오지에(Sébastien Ogier)와 로반페라(Kalle Rovanperä)가 2승씩 차지했고 지난해 우승자는 엘핀 에반스(Elfyn Evans)였다.
사파리 랠리 출전 차량은 전용 장비와 세팅이 필요하다. 외형상 가장 큰 구별점이라면 스노클을 빼놓을 수 없다. A필러를 따라 지붕으로 이어지는 굵은 관 형태의 스노클은 엔진에 안정적으로 공기를 공급한다. 갑작스런 폭우로 생긴 물웅덩이를 건널 때 엔진으로 물이 들이치는 것도 막아준다.
야생을 달리는 만큼 지상고도 훨씬 높아야 한다. 머드가드, 진흙이 흘러내리는 특수 코팅 등이 사용되고, 라디에이터를 보호하는 메시 그릴, 바닥 보호용 스키드 플레이트 등도 쓰인다. 경기가 열리는 나이바샤 인근은 해발고도가 거의 1,900m에 달해 공기가 희박한 만큼 출력 보강을 위한 전용 엔진 매핑도 필수다. 연간 WRC 이벤트 가운데 사파리 랠리 출전 차량이 가장 이질적인 존재라고 할 수 있다.
현대 월드랠리팀(이하 현대팀)은 시즌 초반을 그 어느 때보다도 힘겹게 보내고 있다. 개막전 몬테카를로와 스웨덴에서 달성하지 못한 포디움 진입에 성공해야 하는 상황. 게다가 사파리는 현대팀 역대 전적을 통틀어 가장 힘든 무대라고 해도 과언이 아닐 만큼 가혹했다. 그래도 꾸준히 내구성을 강화하고 약점을 개선한 결과 지난해에는 2, 3위로 더블 포디움을 달성할 수 있었다.
드라이버 라인업은 스웨덴과 같이 티에리 누빌(Thierry Neuville), 아드리안 포모(Adrien Fourmaux), 에사페카 라피(Esapekka Lappi)로 구성했다. 지난해 3위를 차지했던 누빌은 사파리 랠리를 준비하는 각오를 다음과 같이 밝혔다.
“케냐 사파리 랠리는 선수와 차량 모두에게 혹독한 대회 중 하나입니다. 올해 어떤 노면과 날씨 조건이 펼쳐질지는 예측하기 어렵지만, 최근 몇 년을 보면 매우 다양한 상황이 나타날 것으로 예상됩니다. 비는 특정 지역에 국지적으로 내리는 경우가 많지만, 일부 스테이지에서는 폭우가 쏟아지고는 하죠. 이런 날씨에 적응하는 것뿐 아니라 차량을 최대한 보호하기 위한 최적의 세팅을 찾아야 합니다. 타이어 파손을 피하는 것 역시 큰 도전입니다. 제 목표는 경기를 무사히 완주하는 것입니다.”
포모 역시 2024년 M-스포트 포드 소속으로 사파리 랠리에서 3위를 기록한 전적이 있다. 현재 챔피언십 포인트 4위여서 경기 초반 4번째로 코스를 달리게 되는데, 사파리에서는 상당히 좋은 포지션이다. 앞 차들이 청소해 놓은 길을 달리면 차에 발생할 수 있는 피해를 줄일 수 있기 때문이다.
라피는 2023년과 2024년 현대팀 소속으로 엔트리 했지만 당시 i20 N 랠리1이 프로펠러 샤프트 내구성 문제를 겪던 시기였고, 두 시즌 모두 리타이어로 경기를 마쳐야 했다. 하지만 당시에도 페이스는 상당히 빨랐기 때문에, 내구성이 개선된 신차로 어느 정도의 성적을 낼지 관심이 모아진다.
현대팀의 WRC 스포츠 디렉터 앤드류 휘틀리(Andrew Wheatley)는 “케냐 사파리 랠리는 시즌 첫 두 대회와는 완전히 다른 양상을 보입니다. 고속 질주가 요구되는 스웨덴과 달리 케냐는 신중한 주행과 인내심이 중요한 대회입니다. 현대 i20 N 랠리1 에보 사양으로 이곳에서 경쟁하는 것은 이번이 처음이지만, 지난해 그리스와 사우디아라비아에서 보여줬듯 이런 험난한 대회에서 좋은 성적을 낼 수 있다고 믿고 있습니다”라며 사파리 랠리를 앞둔 각오를 밝혔다.
토요타는 엘핀 에반스를 필두로 올리버 솔베르그(Oliver Solberg)와 다카모토 가츠타(Takamoto Katsuta)가 출전하고, 파트타임 드라이버인 세바스티앙 오지에가 다시 엔트리했다. 사미 파야리(Sami Pajari)도 출전해 모두 5대의 야리스 랠리1이 출전한다.
스웨덴 우승을 통해 챔피언십 선두에 올라선 에반스는 지난해 사파리 랠리 우승 포함 3번의 포디움 전적이 있다. 우승 기록으로는 2승의 오지에가 현역 드라이버 가운데 가장 앞선다. 토요타의 제조사 포인트 담당은 에반스, 오지에 그리고 솔베르그가 맡는다. 하지만 가츠타도 3번의 사파리 포디움 전적이 있고, 파야리는 지난해 사파리 4위로 좋은 면모를 보였었다.
스웨덴에서 시즌 첫 포인트 획득에 성공한 M-스포트 포드는 조쉬 멕켈런(Josh McErlean)과 존 암스트롱(Jon Armstrong) 두 명을 엔트리 했다. 맥컬린은 지난해 사파리에서 10위로 득점권에 턱걸이했었고, 신예 암스트롱은 사파리 첫 출전이다.
올해의 사파리 랠리는 스테이지에 변화가 있었다. 2021년 복귀 이후 오프닝으로 사용됐던 나이로비 인근의 카사라니(Kasarani) 슈퍼 스페셜 스테이지가 사라지고, 나이바샤 호수 인근에서 모든 경기를 치렀다. 3월 12일 목요일은 캠프 모란(Camp Moran)과 음자비부(Mzabibu) 2개 스테이지를 달렸다.
최대 변수는 날씨였다. 나이바샤 일대에 폭우가 내리면서 스테이지 일부가 진창으로 바뀐 것이다. 라피는 이를 두고 “이런 건 전에 본 적이 없어요. 정찰 차량으로 스테이지를 통과한 것만으로도 이미 큰 성과입니다. 실제 경기에서는 어떨지 봐야 알 것 같습니다. 비가 더 내리면 접지력이 거의 사라지겠죠. 그렇게 되면 물웅덩이는 물론 물로 가득 찬 긴 직선구간을 달려야 하는데, 차를 전혀 제어할 수 없게 됩니다. 멋대로 가는 거죠. 정말 아슬아슬한 모험이 될 겁니다”라며 힘겨운 경기를 예상했다.
약한 비가 내리는 가운데 시작된 SS1 캠프 모란의 길이는 24.35km. 지난해(31.4km)보다는 짧아졌지만, 여전히 장거리에 속하는 스테이지다. 솔베르그가 톱타임을 기록하며 선두에 섰고 에반스, 오지에, 가츠타가 뒤를 이었다. 누빌과 포모, 라피는 각기 6, 7, 9위를 기록했다.
폭우로 스테이지 일부가 진창으로 바뀌면서 일정 내내 드라이버들을 괴롭혔다. 영상: WRC (http://www.wrc.com)
누빌은 현대팀에서 가장 빨랐음에도 솔베르그와 2분 이상의 차이가 벌어졌다. 스테이지의 변화무쌍한 노면을 체험한 그는 “이런 상황에서는 랠리카가 아니라 보트가 있어야 할 것 같습니다. 조심해서 운전했는데, 어디가 미끄러운지, 코너 넘어 뭐가 있을지 알 수 없으니까요. 모든 게 제대로 작동하지 않고, 브레이크를 포함해 모든 게 너무 차갑습니다”라며 어려움을 밝혔다.
날씨가 맑아져 노면 상태는 개선됐지만, 이번에는 반대로 과열 문제가 속출했다. 영상: WRC (http://www.wrc.com)
누빌과 포모는 물론, 라피까지 엔진 과열을 겪는 등 현대팀의 고군분투가 이어졌다. 영상: WRC (http://www.wrc.com)
8.86km로 비교적 단거리인 SS2 음자비부는 스와힐리어로 포도를 뜻하는 이름답게 대규모 포도 농장을 가로지른다. 하늘이 개어 노면 상태가 개선됐지만, 오지에의 톱타임을 필두로 토요타팀의 강세가 여전했다. 현대 트리오는 포모가 충돌로 인해 엔진에 문제가 생겼고, 누빌도 연기를 날리며 피니시 라인을 통과했다. 라피도 출발 직후부터 경고등이 연이어 켜지는 등 많은 선수가 과열 문제에 시달렸다. 엄청난 오프닝 질주를 보여주었던 솔베르그는 앞창 김 서림 문제로 페이스가 떨어졌지만, 종합 선두를 지키며 첫날을 마쳤다.
3월 13일 금요일은 캠프 모란을 시작으로 이번 경기 최장인 25.04km의 롤디아(Loldia), 케젠 지오서멀(Kengen Geothermal) 그리고 13.79km의 케동(Kedong) 4개 스테이지를 오전과 오후에 반복해 달렸다. 사파리를 상징하는 페시페시(fesh-fesh) 흙을 포함해 험난한 지형으로 이루어진 137.19km 거리를 달리는 혹독한 하루가 펼쳐졌다.
페시페시는 화산재가 풍화된 고운 흙을 말한다. 엄청난 흙먼지를 일으키며 드라이버의 시야를 가로막을 뿐 아니라 흡기구를 막아 엔진 성능을 떨어뜨리고, 심하면 엔진을 파손시키기도 한다. 비가 내릴 경우 얼음 위를 달리는 수준의 미끄러운 진창으로 변하며 드라이버를 고전시킨다. 두터운 페시페시 지형에 타이어가 빠지면 오도가도 못하는 신세가 될 수도 있다.
폭우는 여전히 큰 변수였다. 목요일 오프닝 스테이지인 캠프 모란을 다시 달릴 예정이었던 SS3가 밤새 내린 폭우로 취소됐다. 도로 곳곳의 바퀴 자국과 물웅덩이로 인해 기술지원 차량과 앰뷸런스가 접근이 불가능한 상태였기 때문이다. SS4 롤디아도 경기 시작을 앞두고 새로 포함했던 험로 구간을 삭제하고 지난해와 동일한 레이아웃으로 되돌리면서 거리가 18.95km로 단축됐다.
모든 팀이 소프트 타이어를 선택한 오프닝 SS4에서는 오지에가 톱타임을 차지했다. 포모가 3번째 빠른 기록으로 암스트롱을 제치고 종합 7위로 올라섰다. 누빌은 경기 중 시동이 꺼져 다소 손해를 보았고, 라피는 느린 페이스로 최대한 안전하게 살아남는 쪽을 선택했다. 과열 문제를 겪던 현대팀은 진흙이 라디에이터에 달라붙어 마르면서 냉각 효율이 떨어진 것을 원인으로 설명했다.
누빌과 포모가 페이스를 끌어올리며 선두권을 향해 추격을 이어갔다. 영상: WRC (http://www.wrc.com)
SS5 케젠 지오서멀은 케냐의 전력 생산 상당 부분을 담당하는 지열발전소 단지를 가로지르는 스테이지로, 증기 배관과 냉각탑 사이를 질주하는 이색적인 풍경을 연출한다. 노면은 불규칙하고, 날카로운 암석과 높은 지열이 차량과 참가자 모두에 큰 부담을 준다.
비교적 건조했던 이번 스테이지에서는 신예 파야리가 톱타임으로 존재감을 드러냈다. 반면 선두 솔베르그는 에반스와의 시차가 27.2초로 좁혀졌다. 현대팀에서는 누빌이 가장 빨랐고 포모가 그 뒤를 따랐다. 누빌은 스테이지 막판에 타이어가 림에서 빠졌지만 시간 손해는 크지 않았다.
이어지는 SS6 케동은 사파리 랠리에서 매우 상징적인 장소다. 날씨로 인해 가혹해진 환경 가운데, 과도한 리타이어 사태를 막기 위해 레이아웃이 일부 조정되었다. 파야리는 이번에도 가장 빨랐다. 누빌은 타이어 손상이 있음에도 선두와 5.5초 차 3번째 기록이었다.
점심 서비스 후 케동을 다시 달린 SS7에서는 오지에가 가장 빠른 기록을 세우며 에반스를 밀어내고 종합 2위로 부상했다. 파야리도 종합 4위를 기록했다. 현대팀은 누빌과 포모는 6위와 7위, 라피는 9위로 순위 변화가 없었다. 암스트롱은 과열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 라디에이터와 인터쿨러를 교체했지만 페이스는 개선되지 않았다. 가츠타와 맥컬린이 타이어 파손으로 손해를 보았다.
SS8 케젠 지오서멀에서는 파야리가 3번째로 톱타임을 기록했다. 포모는 코스를 벗어나 바위와 충돌하면서도 타이어 펑크는 모면한 반면 솔베르그는 뒷타이어 펑크로 30초가량 손해를 보았다. 솔베르그는 아직 선두지만 오지에와의 시차가 1초까지 좁혀졌다.
SS9 롤디아에서는 오지에가 가장 빨랐다. 하지만 단 0.03초 차이로 선두는 여전히 솔베르그였다. 스페어 타이어를 다 써버린 가츠타가 리타이어를 피하려 안전 운행에 들어간 사이 누빌과 포모가 5, 6위로 순위를 끌어올렸다. 반면 라피는 야생동물 무리에 가로막혀 10초가량 손해를 보았다.
금요일을 마무리하는 SS10 음자비부에서는 다시 파야리가 톱타임을 기록했다. 솔베르그가 스테이지 2위를 기록하며 아슬아슬하게 종합 선두 자리를 지켜냈고, 불과 1초 뒤로 오지에가 추격했다. 3위 에반스, 4위 파야리 뒤로 누빌이 5위, 포모가 6위였고 라피는 8위였다.
토요일부터 포모가 페이스를 끌어올리며 포디움을 가시권에 두기 시작했다. 영상: WRC (http://www.wrc.com)
3월 14일 토요일은 24.94km 길이의 소이삼부(Soysambu)를 시작으로 엘멘테이타(Elmenteita), 슬리핑 워리어(Sleeping Warrior)까지 3개 스테이지를 오전과 오후에 반복해 달렸다. SS11~SS16 6개 스테이지 합산 122.72km 구간에서 경기를 치렀다. 많은 팀이 오늘을 가장 어려운 날로 예상했다.
토요일의 오프닝 SS11 소이삼부는 2024년과 비슷한 역방향으로 진행이며, 바위가 많던 구간은 제거되었다. 속도를 낼 수 있는 탁 트인 지형과 좁고 험한 도로가 번갈아 나타난다. 원래는 상징적인 물길 건너기로 유명하지만 밤새 내린 비 때문에 진흙탕과 물웅덩이 투성이였다.
첫날에 이어 솔베르그가 다시 톱타임을 기록하며 추격자들과의 거리를 벌렸다. 반면 오지에는 고속 구간에서 바위를 들이받고 타이어가 터지면서 2분 이상의 손해를 입었다. 에반스와 파야리가 2, 3위로 올랐고, 포모도 종합 4위로 올라서 포디움을 가시권에 두고 있었다. 포모는 경기 직후 “몇몇 구간은 깊게 파인 곳이 많아 차에 충격이 가해져 달리기 쉽지 않았어요. 곳곳에 물웅덩이가 있어 시간이 걸렸지만 괜찮습니다. 기록에는 꽤 만족합니다”라며 소감을 전했다.
18.01km의 SS12 엘멘테이타는 호숫가를 배경으로 달리는 고속 스테이지로 정교한 컨트롤을 요구한다. 하지만 이번에도 진흙탕 구간이 많아 속도를 낼 수 없었다. 움푹 파인 노면 때문에 솔베르그와 에반스, 암스트롱, 라피 등이 타이어 펑크에 시달렸다. 참가자들은 FIA와 랠리 주최측이 코스 사전답사를 제대로 하지 않았다며 분통을 터뜨렸다. 포모와 누빌은 오지에 다음으로 빨랐다. 포모는 종합 4위, 누빌은 6위, 라피는 7위를 기록했다.
이어지는 SS13 슬리핑 워리어는 사파리 랠리에서 가장 유명한 스테이지 중 하나로, 산과 언덕의 윤곽이 마치 거대한 전사가 바닥에 편안히 누운 모습이라 붙여진 이름이다. 현지 마사이족에게는 신성한 장소로 여겨진다. 하지만 이름과 달리 랠리 코스로서는 악명이 자자한데, 고속 구간에서 속도를 높이다 보면 전복되기 쉽고, 만약 비가 내리면 미끄러운 진흙탕으로 돌변한다.
이번 역시 난관의 연속이었다. 포모와 누빌은 다시 엔진 과열 문제를 겪었고, 라피는 워셔액이 떨어져 시야 확보에 애를 먹었다. 하지만 진짜 비운의 주인공은 에반스였다. 오른쪽 뒤 서스펜션이 파손되면서 리타이어했다. 오지에가 연속 톱타임으로 종합 2위로 올라섰다. 누빌이 종합 4위가 되고 포모가 5위, 라피가 6위로 부상했다. 랠리1 차량들이 모두 달린 후 주최 측은 코스가 너무 위험하다며 나머지 클래스를 중단시켰다.
누빌은 스페어 타이어까지 모두 소모할 정도의 난관을 겪고 결국 경기를 포기해야 했다. 영상: WRC (http://www.wrc.com)
점심 서비스를 받은 후 포모는 소이삼부를 다시 달린 SS14에서 현대팀 첫 톱타임을 기록하며 우승 경쟁에 뛰어들었다. 반면 누빌은 스페어 타이어까지 모두 소모하는 바람에 경기를 이어갈 수 없었다. 대신 라피가 종합 3위로 올라섰다. 사파리의 악몽은 토요타라고 다르지 않았다. 선두 경쟁을 벌이던 솔베르그와 오지에가 오전 스테이지를 마친 후 서비스로 복귀하다가 엔진 문제로 동반 리타이어했다. 진흙이 엔진룸 내부로 유입되어 발전기를 고장 낸 것이었다. 종합 선두는 가츠타가 이어받았다.
SS15에서는 파야리가 톱타임을 기록하며 라피를 제치고 종합 3위로 올라섰다. SS13이 취소됨에 따라, 같은 구간을 달리는 SS16도 취소되어 토요일의 순위가 이대로 유지됐다. 가츠타가 종합 선두, 1분 25초 뒤에 포모가 있고 멀찍이 4분 떨어진 파야리가 3위다. 일반적인 경우라면 1, 2위 확정에 3위 싸움이겠지만 이번 사파리 랠리는 이변이 많은 만큼 순위를 쉽게 단정할 수 없었다.
경기 마지막 날인 3월 15일 일요일은 오세렝고니(Oserengoni)와 헬스 게이트(Hell's Gate) 2개 스테이지를 반복하는 구성이었다. 4개 스테이지 합산 거리는 57.4km였다. 18.22km의 SS17 오세렝고니는 좁고 테크니컬한 코너로 드라이버의 집중력을 최후까지 시험하는 무대다. 비 예보 없이 맑고 건조한 날씨가 예고됐다.
토요일 리타이어했던 누빌을 비롯해 오지에, 에반스, 솔베르그는 슈퍼선데이 추가점수를 확보하기 위한 전력투구에 나섰다. 한편 맥컬린은 엔진 문제로 출전할 수 없었다. 톱타임을 잡은 것은 오지에였다. 종합 선두로 사파리 랠리 우승에 가장 가까워진 가츠타는 2위 포모와 1분 25초의 시차가 있는 만큼 무리하지 않는 모습을 보였다.
포모가 페이스를 끌어올리며 선두와의 차이를 크게 줄였다. 영상: WRC (http://www.wrc.com)
헬스 게이트는 케냐에서 손꼽히는 관광지 중 하나인 헬스 게이트 국립공원 안에서 진행된다. 거대한 암벽 사이 좁은 틈이 마치 지옥으로 들어가는 입구처럼 보인다고 해서 붙여진 이름이다. 스테이지 막판에 만나게 되는 수십 미터 높이의 암벽들은 멀리서도 시각적인 압박감을 준다. 파워 스테이지의 예행연습인 SS18 헬스 게이트에서는 에반스가 가장 빨랐다. 포모도 페이스를 올려 가츠타와의 차이를 1분으로 줄였다. 반면 파야리와 라피는 완주에 중점을 두고 안전하게 달렸다.
오세렝고니를 다시 달린 SS19에서는 솔베르그가 톱타임을 가져가면서 슈퍼선데이 득점에 가장 유리한 고지에 섰다. 포모는 가츠타와의 격차를 42초까지 줄였지만 가츠타를 저지하기에는 쉽지 않은 거리였다. 헬스 게이트를 다시 달리는 최종 스테이지이자 파워스테이지인 SS20까지 마친 끝에 토요타의 가츠타가 개인 통산 첫 승리를 거머쥐었다. 포모가 2위, 3위는 파야리가 차지했다. 라피는 4위로 완주에 성공했다. 로버트 비르베스(Robert Virves)를 비롯해 5위부터는 WRC2 클래스 선수들의 차지였다. 솔베르그가 10위로 득점권에 겨우 안착했다.
이번 시즌 현대팀의 첫 포디움이자 WRC 통산 10번째 포디움에 오른 포모는 “시작은 어려웠지만 좋은 마무리를 할 수 있어 다행입니다”라며 기쁜 표정으로 소감을 밝혔다. 드라이버 챔피언십 순위에서는 변화가 크지 않았다. 에반스가 선두를 지켰고 솔베르그, 가츠타, 포모는 순위를 유지했다.
반면 제조사 포인트에서는 현대팀이 선전했다. 포디움에 오른 가츠타와 파야리가 이번 랠리의 포인트 담당 드라이버가 아니었기 때문이다. 덕분에 현대팀은 토요타와의 점수 차이를 8점 정도 좁힐 수 있었다.
역대급 난이도의 사파리 랠리를 완주한 참가자들은 다시 유럽으로 발길을 돌렸다. 제4전은 4월 9~12일 크로아티아에서 열리는 시즌 첫 타막 랠리다. 지난해 캘린더에서 빠졌다가 중앙유럽 랠리가 사라지면서 그 공백을 대신한다. 다만 개최 지역은 이전의 수도 자그레브(Zagreb)가 아닌 항구도시 리예카(Rijeka)다.
글. 이수진 (자동차 평론가)
1991년 마니아를 위한 국산 자동차 잡지 <카비전> 탄생에 잔뜩 달아올라 열심히 편지를 보냈다가 덜컥 인연이 닿아 자동차 기자를 시작했다. <카비전>과 <자동차생활>에서 편집장과 편집 위원을 역임했고, 지금은 자동차 평론가로 활동 중이다. 전기차와 커넥티드카, 자율주행 기술 같은 최신 트렌드를 열심히 소개하면서도 속으로는 기름 냄새 풍기는 내연기관 엔진이 사라지지 않기를 기원하는 ‘자동차 덕후’이기도 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