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도와 동남아시아는 거대 시장이라는 단어 하나만으로는 정의할 수 없는 곳이다. 기술의 수용 속도가 빠르고 고객의 눈높이는 계속 향상되며, 도로나 기후, 인프라와 같은 주행 조건은 매우 거친 편이다. 현대자동차그룹 인도기술연구소(Hyundai Motor India Engineering Center)는 바로 이 역동적인 무대 한복판에서 신흥 시장을 위한 소형차 개발의 핵심 R&D 거점으로 진화하고 있다.
사실 인도기술연구소의 첫 시작은 지원 조직이었다. 남양연구소의 글로벌 개발을 뒷받침하며, 현지 시장에 최적화된 차량 개발을 돕는 역할이었다. 하지만 이를 통해 축적된 엔지니어링 역량과 경험은 곧 역할의 확장으로 이어졌다. 단순한 지원을 넘어, 인도와 아세안 시장이 요구하는 성능과 품질, 그리고 가격 경쟁력의 균형점을 찾아내는 연구 조직으로 거듭난 것이다.
인도 시장은 생활환경과 주행 조건이 남다르다. 따라서 기존의 개발 공식을 그대로 적용하기에는 한계가 있다. 극한의 더위와 몬순 기후*, 거친 도로 환경과 높은 교통 밀도, 지역별로 다른 사용 패턴까지, 차량 개발에 고려해야 할 조건 중 상당수가 기존과 다르고, 동시에 고객이 원하는 기준 또한 나날이 높아지고 있다. 인도기술연구소는 이러한 현실을 고려해 현지의 요구 조건을 기술 개발로 극복하고, 신기술을 상품 경쟁력으로 전환하는 해법을 축적해 왔다. 비로소 독자적인 기술 개발 역량을 갖추게 된 인도기술연구소는 인도와 아세안을 아우르는 소형차 개발의 전진기지로서 신흥 시장을 위한 차량의 기준을 세우고 있다.
*몬순 기후(Tropical Monsoon Climate): 계절풍의 영향으로 우기에 비가 집중되는 기후.
① 남양연구소를 지원하며 인도 시장을 배우다 (2006~2014)
현대차그룹이 인도에 R&D 거점을 마련한 배경에는 분명한 이유가 있다. 1998년 인도 진출 이후 인도 경제는 경제 자유화의 흐름을 타고 빠르게 성장했고, 산업 전반의 엔지니어링 역량과 기술 개발 기반도 눈에 띄게 강화됐다. 구매 수요가 늘어나며 고객의 요구도 세분화됐다. 게다가 인도는 지역마다 사용 조건도 달라 고려해야 할 항목들은 기하급수적으로 늘어났다. 현지 니즈를 정확히 파악하면서 즉각 대응할 수 있는 R&D 체계가 필요해진 것이다.
2006년 인도기술연구소는 먼저 첸나이에 기반을 잡았다. 초기에는 규제 변화에 대한 모니터링과 공장을 지원하는 팀을 갖춰 현지 사정에 알맞은 차량을 개발할 수 있도록 기반을 다졌다. 동시에 소프트웨어 허브로 떠오르던 하이데라바드에는 우수 인재를 확보하기 위한 전용 오피스를 개설했다. 두 거점은 서로 다른 역할을 수행했지만 지향점은 같았다. 인도 시장의 속도와 변화에 대응하기 위해 개발 과정에서 현장 대응력을 갖추는 것이었다. 그렇게 인도기술연구소는 시장의 요구와 제품의 경쟁력 사이의 간극을 줄이기 위해 CAE 분석* 및 엔지니어링 설계 분야에서 남양연구소의 차량 개발을 지원했다. 그리고 그 과정에서 인도 시장의 요구 조건과 고객의 기대를 데이터와 경험으로 축적해 나갔다.
*CAE(Computer-Aided Engineering) 분석: 차량의 구조, 강성, 진동, 열, 유동 등의 성능을 시뮬레이션으로 예측하고 검증하는 과정
2007년 이후 인도기술연구소는 빠르게 성장했다. 인도 특화 프로젝트가 늘어나며 개발 지원의 범위가 넓어졌고, 이에 따라 조직과 기능도 점차 확장됐다. 아울러 인도 시장을 깊이 이해하고 더 정교하게 대응하기 위한 체계화도 진행됐다. 그렇게 인도기술연구소는 개발 지원 조직을 넘어, 현지화 기술을 본격적으로 다루기 위한 토대를 마련하며 다음 단계로 나아갈 준비를 마쳤다.
② 현지화 개발의 중심에 서다 (2015~2022)
인도기술연구소는 기술 개발의 자립을 위해 조직과 인프라에 변화를 시도했다. 2010년에는 디지털디자인팀과 전자설계팀을 신설하여 개발 영역을 한층 넓혔다. 2012년에는 변화가 더 두드러졌다. 바디, 섀시, 파워트레인 테스트 조직을 신설해 차량 개발을 주도할 수 있는 인프라를 갖췄다. 비로소 현지에서 성능과 내구, 신뢰성을 직접 확인하며 개선점을 도출할 수 있는 체계가 만들어진 것이다. 이 시기 인력 규모도 크게 늘었다. 시장의 변화 속도와 복잡성을 빠르게 따라잡기 위해서는 개발 역량을 빠르게 키워야 했고, 연구소는 그에 맞춰 체질을 바꿔 나갔다.
2015년 인도 시장에서 현지화 기술에 대한 수요가 급증하면서 인도기술연구소의 역할은 더욱 늘어났다. 개발 범위는 인도 시장 조건에 최적화된 인포테인먼트, 소프트웨어, 관련 플랫폼 영역으로 확대됐고, 인기 모델인 크레타, 베르나, 베뉴 등 현지 개발을 추진하는 과정에서 연구소의 존재감은 더욱 커졌다.
③ 신흥 시장 소형차 개발의 허브로 발돋움하다 (2023~2030)
그동안 쌓은 역량은 이후 인도기술연구소가 더 큰 역할을 맡기 위한 출발점이 되었고, 조직 또한 한층 정교해졌다. 2021년 현대선행디자인팀이 신설되었고, 2023년에는 인도프로젝트관리팀, 원가팀, 엔지니어링솔루션팀, 샤시바디시험팀 등 추가적인 개발 조직이 새롭게 출범했다. 한편 2024년 이후 인도의 자동차 수요는 하이테크 차량 중심으로 빠르게 이동했다. 이에 맞춰 인도기술연구소는 커넥티비티와 주행 보조 기술을 포함한 개발 역량을 강화하며 신흥 시장을 위한 종합적인 R&D 허브로 발전했다. 그 결과 현지 조건을 이해하는 수준을 넘어, 현지 조건에 맞는 해법을 스스로 설계하고 검증하는 조직으로 자리매김했다.
인도기술연구소의 존재감은 인도 전략형 모델의 눈부신 성과로 증명된다. 인도기술연구소가 글로벌 소형차 개발 허브로 진화할 수 있었던 배경에도 인도 시장의 변화에 발맞춘 현지화 전략 차량들이 있었다.
① 현대차 크레타 - 현지화 개발 전략을 성과로 증명한 첫 모델
인도기술연구소가 개발에 참여한 첫 번째 인도 현지 모델은 2015년 출시된 현대차 크레타(Creta)다. 현대차는 크레타를 인도 시장에서 브랜드의 존재감을 끌어올릴 B-세그먼트 플래그십 SUV로 목표하고 현지에 최적화된 상품 경쟁력을 확보하기 위해 많은 노력을 기울였다.
크레타 개발의 핵심은 현지화 수준을 과감히 끌어올린 것이었다. 인도기술연구소는 이상적인 패밀리 SUV라는 이미지를 구현하기 위해 현지 테스트와 고객 피드백 반영에 더 큰 비중을 두었다. 그 결과 크레타는 출시 이후 현재까지 인도 B-세그먼트 SUV 베스트셀러의 지위를 유지하며, 인도기술연구소의 개발 역량을 상징하는 모델로 자리 잡았다.
② 현대차 베뉴 · 기아 쏘넷 · 기아 시로스 – 작은 차체에 큰 상품성을 담다
인도는 차체 길이 4m 미만 차량에 세제 혜택을 제공한다. 우리나라의 경차 혜택과 비슷하다. 인도기술연구소는 길이 4m 미만 소형 SUV 세그먼트에 대응하기 위해 현대차 베뉴(Venue), 기아 쏘넷(Sonet), 기아 시로스(Syros)를 남양연구소와 함께 개발하고 제도 및 환경에 최적화된 현지화를 추진했다.
이 모델들의 개발 스토리는 명확하다. 제한된 차체 크기 안에서 공간, 기술, 스타일을 극대화한 것이다. 하지만 작은 차를 개발하는 일은 결코 쉽지 않다. 공간을 확보하려면 치밀한 설계가 필요하고, 작은 공간 안에 다양한 기술을 넣으려면 비용과 패키징을 동시에 해결해야 한다. 현대차그룹은 이러한 조건에 맞춰, 커넥티드카 기술과 같은 첨단 기능을 제공하면서도 가격과 상품성의 균형을 유지하는 방법을 선택했다.
한 가지 예로 기아 시로스는 실내 편의를 극대화하기 위해 동급 최고 수준의 2열 레그룸과 2열 통풍 시트, 슬라이딩 및 리클라이닝이 가능한 2열 시트를 구현했다. 인도 소비자의 니즈를 정확히 파악하고 이를 상품성으로 연결한 인도기술연구소의 역할이 시로스의 경쟁력을 뒷받침한 셈이다. 이러한 접근은 베뉴, 쏘넷, 시로스를 길이 4m 미만 소형 SUV 세그먼트의 핵심 모델로 만들었고, 인도에서 현대차와 기아의 시장 점유율을 끌어올리는 데 큰 역할을 했다.
③ 현대차 엑스터 - 젊은 고객을 겨냥한 마이크로 SUV
현지화 전략이 성숙해질수록 인도기술연구소는 더 세분화된 고객층을 겨냥하기 시작했다. 현대차 엑스터(Exter)가 이런 변화를 대표하는 결과물이다. 엑스터는 젊은 인도 고객층을 타깃으로 개발된 마이크로 SUV로, 합리적인 가격과 세련된 디자인, 그리고 SUV 스타일링을 콤팩트한 패키지 안에 담아내 좋은 반응을 끌어냈다. 특히 현지 요구에 충족하는 안전성과 디지털 기능, 뛰어난 연비 등은 인도기술연구소의 확장된 역량이 충실히 반영된 결과였다.
이처럼 크레타로 시작된 현지화 개발 경험은 엑스터로 이어지며 성공적으로 확장됐다. 성과는 단순히 라인업 확장이나 판매에서 멈추지 않았다. 인도에서 권위 있는 시상식 가운데 하나로 꼽히는 ‘인도 올해의 차(Indian Car of the Year)’에서 현대차는 8회, 기아는 1회 수상을 기록했으며, 이러한 성과는 인도 시장에서 현대차그룹 차량의 가치와 중요성을 입증하는 지표로 인식되고 있다.
인도와 신흥 시장 수요는 하이테크 중심으로 빠르게 이동하고 있다. 디지털 사양과 커넥티비티에 대한 기대가 높아지면서 작고 합리적인 차에도 수준 높은 이동 경험이 요구된다. 인도기술연구소는 이러한 변화에 대응하기 위해 2023년부터 시장 변화를 정기적으로 감지하고 신흥 시장에 필요한 하이테크 기술을 개발하는 체계를 강화하고 있다.
인도기술연구소가 추구하는 R&D 목표는 다음과 같다. 먼저 시장 트렌드와 고객 니즈를 지속적으로 살피고 신기술 개발 역량을 강화하기 위해 글로벌 기관 및 학계와의 협업을 확대한다. 동시에 전 세계 신흥 시장에 맞춰 신기술 아키텍처를 현지화하고 최적화하는 역할까지 맡는 것이다.
전동화 전환 역시 체계적으로 진행하고 있다. 인도의 전기차 시장은 성장 궤도에 있지만, 충전 인프라 부족과 높은 초기 구매 비용과 같은 해결해야 할 현실적인 과제도 있다. 이에 인도기술연구소는 시장 환경을 철저히 분석하고 현실에 걸맞은 EV 라인업을 제안하고 있다. 동시에 급변하는 인도 시장의 변수도 고려하고 있다. 충전 환경, 도로 품질, 배터리 성능과 같은 요소에 대응하는 테스트를 직접 진행해 예상되는 문제를 미리 파악하고 이에 필요한 기술과 인프라 구축을 준비해 나가는 중이다.
이 같은 변화는 자동차를 넘어 모빌리티로 확장될 전망이다. 인도에서 라스트마일 역할을 하는 3륜차는 여전히 인도 경제 성장을 뒷받침하는 중요한 이동 수단으로, 빠르게 전동화가 진행되고 있다. 현대차그룹은 ‘휴머니티를 향한 진보(Progress of Humanity)’라는 비전 아래 인도 TVS 모터 컴퍼니와 협력해 완전히 새로운 전기 3륜차 콘셉트 모델 ‘E3W’를 선보인 바 있다.
콤팩트한 크기와 뛰어난 기동성을 갖춘 E3W 콘셉트는 좁은 골목길도 손쉽게 주행할 수 있도록 설계됐다. 또한 대형 타이어, 수납공간 등 현지 주행 환경과 사용성을 고려한 솔루션을 적용해 공개 당시 많은 관심을 받았다. E3W 콘셉트가 상징하는 바는 분명하다. 인도 시장의 니즈를 정확히 파악해 효율성과 포용성을 높이고, 인도에서 검증된 해법을 글로벌 시장으로 확장할 수 있는 가능성을 열어두는 것이다. 이는 인도기술연구소의 역할이 소형차 개발을 넘어, 신흥 시장의 모빌리티 솔루션을 설계하는 단계로 진화하고 있음을 보여주는 장면이기도 하다.
이러한 방향성은 인프라 투자 계획으로도 구체화된다. 현대차그룹은 2028년 인도 차량시험장과 파일럿센터를 포함한 신흥시장 통합 R&D 허브를 설립할 계획이다. 여기에서 주목할 점은 앞으로 인도에서 차량 테스트를 수행하며 차량 개발 속도와 완성도를 함께 끌어올릴 수 있게 된다는 사실이다. 차량 통합 개발 솔루션을 목표로 성장하고 있는 인도기술연구소는 신흥 시장의 새로운 기준을 세우는 연구 조직으로 다음 장을 열어가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