가족과 함께 집 밖으로 나선 주인공이 뒷좌석으로 탑승합니다. 안전벨트를 매고 창밖 풍경을 감상하며 달리다 보니, 어느덧 바닷가의 풍경이 펼쳐집니다. 강원도에 도착한 이들은 전통시장과 캠핑장 등을 방문하며 잊을 수 없는 추억을 쌓았죠. 그리고 이튿날 아침, 수평선 위로 떠오르는 태양을 바라보며 주인공 가족의 동해 여행이 마무리됩니다.
누군가에겐 그다지 어려울 것 없는 1박 2일의 국내 여행. 하지만 이동이 불편한 교통약자라면 이야기가 다릅니다. 지난 7월 19일 현대자동차그룹이 공개한 캠페인 영상 ‘The Moving Room’의 주인공 김온유 씨는 23년째 호흡 보조 장치와 함께 생활하고 있습니다. 평소 병실에서는 기계 호흡기를 쓰다가, 외부로 나가야 할 땐 수동식 인공호흡기 엠부(Ambu)를 사용하죠. 외출 시에는 체력 소모가 심해 휠체어를 이용하고 있습니다. 여행을 비롯한 장거리 이동은 사실상 불가능에 가까웠습니다.
기아 PV5 WAV(Wheelchair Accessible Vehicle)는 이러한 교통약자의 자유로운 이동을 돕기 위해 탄생했습니다. PV5 패신저의 시트 구성을 바꾸고 뒷좌석 승하차를 돕는 측면 슬로프와 전용 안전벨트 등 특화 옵션을 탑재해, 휠체어 탑승자가 편리하고 안전하게 움직일 수 있도록 제작됐습니다.
이 같은 설계는 차량 그 이상의 플랫폼(PBV, Platform Beyond Vehicle)으로 태어난 PV5만의 특성 덕분에 가능했습니다. 현대차그룹의 전동화 PBV 전용 플랫폼 ‘E-GMP.S’는 운전석 위치와 후륜 서스펜션 구조를 최적화하고 저상화 풀 플랫 플로어를 구현해, 내연기관 차량에 기반한 전동화 경상용밴보다 실내 공간을 여유롭게 활용할 수 있습니다. 패신저, 카고, 오픈베드 등 다양한 PV5 파생 모델이 저마다 목적에 맞는 충분한 공간을 확보할 수 있었던 이유입니다.
그렇다면 PV5 WAV의 공간을 채운 세심한 디테일은 어떤 고민을 거쳐 완성됐을까요? 현대차그룹 MSV클로저설계1팀 한정호 책임연구원과 MSV내장설계1팀 유한수 책임연구원을 만나, 그들이 담당한 PV5 WAV의 수동식 인플로어 2단 슬로프와 시트에 대한 이야기를 자세히 들어 보았습니다.
PV5 WAV의 모든 디테일은 휠체어 탑승객이 일상에서 실제로 겪는 불편함을 해소하는 데 초점이 맞춰져 있습니다. 기본은 ‘탑승’입니다. 휠체어에 앉아 있는 상태로 차량에 진입하려면 슬로프를 이용해야 합니다. 이때 중요한 것이 슬로프의 각도인데요. 기아는 국내 버스에 적용된 슬로프와 지면 사이 각도 규정인 ‘14° 이하’를 목표로 삼았습니다. 그런데 뜻밖의 문제가 있었습니다.
“슬로프를 만들고 직접 휠체어를 밀어보니까, 여전히 조금 무거웠습니다. 그래서 각도를 13°까지 낮추기로 했죠. 슬로프 총 길이를 1,750mm로 설정한 까닭입니다. 다만 그럴 경우 차체 바닥에 그대로 수납할 수 없기 때문에 2단으로 펼쳐지는 구조를 적용해야 했습니다. 1단 길이는 1,250mm며, 완전히 펼치면 500mm가 연장되는 방식입니다.” 슬로프 제작을 담당한 한정호 책임연구원의 설명입니다.
덕분에 끝까지 펼친 슬로프가 지면에 놓일 때 13°의 목표 경사각을 안정적으로 확보할 수 있었습니다. 높이 150mm 인도 위에 펼치면 1단에서 11°, 2단에서 8°까지 만들 수 있죠. 이때는 수동식 휠체어 탑승자가 스스로 차량에 진입하는 것도 한결 수월해집니다.
슬로프를 차체 바닥에 적용하는 과정은 쉽지 않았습니다. 전기차 기반 교통약자 차량은 측면 출입 방식을 거의 쓰지 않습니다. 하부 배터리 탓에 스텝 높이를 무작정 낮출 수 없어서입니다. 여기에 2단 슬로프까지 적용하면 실내 헤드룸이 더 좁아집니다. 즉 ‘슬로프 두께 최소화’가 필수였습니다.
다음 과제는 슬로프의 강성. 탑승객 스스로 운전할 수 있는 전동식 휠체어의 무게는 제품에 따라 200kg을 넘나듭니다. 게다가 사람의 몸무게도 고려해야 하죠. “일반적인 모든 사용 조건을 만족하기 위해 허용 하중을 300kg으로 잡았습니다. 동시에 슬로프 자체 무게를 줄이고자 두 패널이 겹치는 오버랩 구간을 작게 만들었는데, 300kg 하중으로 내구성 테스트를 해보니까 몇 번만 이동해도 부러지더군요.”
슬로프의 두께, 길이, 강성까지 모두 만족시켜야 하는 상황. 그래서 또 다른 PV5 개발 부서와 긴밀히 협조해 차량 바닥 높이 상승을 최소화하면서 슬로프를 탑재하고, 패널 오버랩 구간을 정했습니다. 2단 구조의 최적화를 위해 수동식 전개 방식을 채택하기도 했죠. 원활한 수동 작동을 위해 무거운 철판 대신 알루미늄을 사용했는데, 보다 더 가볍게 만들기 위해 강성은 유지하고 속은 비워 낸 허니콤 구조 알루미늄 패널을 적용했습니다. 영상의 장면과 같이 누구나 손쉽게 슬로프를 꺼낼 수 있는 이유는, 이처럼 치밀한 설계가 반영되었기 때문입니다.
구조적 한계에 도전하면서까지 측면 출입 방식을 고집한 이유는 단 하나, 휠체어 탑승자 역시 일반 탑승자와 다름없이 차량에 드나들기를 바랐기 때문입니다. 기존의 트렁크 출입 방식 차량에 타려면 탑승자가 인도에서 차도로 내려가야 하는 위험을 감수해야 합니다. 차에 탄 이후에도 가족 또는 지인과 격리된 공간에 머물러야 하죠. ‘짐 공간’으로 쓰이는 트렁크에 들어간다는 것도 휠체어 탑승자에게 소외감을 안깁니다. PV5 WAV는 이러한 물리적·심리적 불편함을 극복했다는 점에서도 남다른 의의를 가집니다.
PV5 WAV 뒷좌석은 휠체어 탑승자의 편리하고 효율적인 동선을 고려해 만들어졌습니다. 휠체어는 슬로프를 타고 정면으로 진입한 뒤, 다시 후진으로 방향을 돌리며 동승석 뒤에 자리잡게 됩니다. 따라서 ‘오른쪽 뒤’ 공간 확보가 중요합니다. 특히 국내에서 쓰이는 다양한 크기의 휠체어를 모두 수용하려면, 실내가 생각보다 훨씬 여유로워야 했습니다.
“휠체어 사이즈와 보호자의 원활한 동선까지 고려했을 때, 3열 시트 쿠션이 들리면 실내 공간 확보에 도움이 될 것 같았습니다. 그래서 쿠션을 들어올릴 수 있는 ‘팁업’ 기능을 적용했습니다. PV5 패신저 모델의 뒷좌석 시트는 왼쪽과 오른쪽이 각각 6:4 비율로 분리되는데요. 이 구조를 그대로 사용하면 휠체어가 후진으로 들어갈 곳이 비교적 좁습니다.”
MSV내장설계1팀의 해답은 좌우 4:6 비율의 시트 구조였습니다. 핵심은 휠체어 탑승객과 보호자의 동행입니다. 우측 시트를 들어올려 휠체어 진입을 마치고 나면, 나머지 좌측 시트에는 보호자가 앉아서 이동할 수 있습니다. 캠페인 영상의 주인공 김온유 씨는 홀로 동떨어진 곳이 아닌 가족이 있는 공간에서 동해 바다로 향했죠. 영상의 한 장면에 오롯이 담긴 네 가족의 얼굴. PV5 WAV가 목표하는 ‘차별 없는 동일한 이동 경험’을 단적으로 보여주는 장면입니다.
유한수 책임연구원을 포함한 MSV내장설계1팀은 최적의 공간을 구현하기 위해 시트를 재구성했습니다. 단순해 보이지만 사실 꽤 까다로운 작업입니다. 일반적인 자동차의 시트는 각 열에 해당하는 법규에 따라 만들어진 뒤 모든 파생 모델에 동일하게 적용됩니다. 하지만 PV5는 용도에 따라 시트 구조가 변합니다. 평소보다 길고 복잡한 인증 절차로 이어질 수밖에 없지요. 쿠션 팁업 기능부터 좌우 폴딩 비율, 휠체어 고정 장치를 보관할 시트 하단 수납함까지, 하나같이 남다른 기능이었기에 연구원들은 더 많은 공을 들여야 했습니다.
차량의 밑바탕이 PV5였기 때문에 개발이 수월하게 진행된 부분도 있습니다. 유한수 책임연구원은 PV5의 넓은 실내를 장점으로 꼽았죠. “휠체어가 차내에서 회전하고 단단히 고정되기까지는 생각보다 많은 공간이 필요합니다. 만약 실내가 더 좁았다면 시트 사이즈를 줄이거나 아예 덜어내야 했을 텐데, PV5는 공간이 워낙 넉넉해 쿠션 팁업 기능을 추가하는 것만으로도 모든 사이즈의 휠체어를 수용할 수 있었습니다.”
2단 슬로프와 뒷좌석 시트. PV5 WAV의 명확한 목적을 상징하는 두 기능은 해당 차량이 처음부터 끝까지 기아 내에서 만들어졌기에 더 높은 완성도를 지닐 수 있었습니다. 별도의 특장 업체를 거치지 않아 오히려 구조적 특성을 100% 활용할 수 있었죠. 슬로프의 패키징을 우선시한 덕분에 수납형 슬로프 최초로 2단 전개 구조를 완성할 수 있었고, 강철로 이루어진 슬로프 입구와 알루미늄 슬로프의 재료 차이를 고려한 강성 최적화 설계까지 가능했습니다.
시트 구성 역시 최초 설계 단계부터 보호자가 동승하는 시나리오가 고려되었습니다. 트렁크로 진입하는 기존 교통약자 지원 차량과는 접근 방법이 달랐던 셈입니다. 이번 캠페인 영상을 시청한 유한수 책임연구원도 “대부분의 교통약자 지원 차량은 휠체어 탑승자가 홀로 앉아서 가는 모습이 일반적인데, 언니와 동생이 나란히 앉아서 가는 장면이 아주 뿌듯했습니다”라며 소감을 전했습니다.
기아는 김온유 씨가 경험한 이동의 편리함을 더 많은 교통약자에게 제공하기 위해 PV5 WAV 관련 사업을 본격화하고 있습니다. 먼저 올해 3월에는 기아 e스포츠 파트너 팀 디플러스 기아 소속 권재혁 선수에게 PV5 WAV를 전달해 프로 활동 지원을 시작했습니다. 지난 4월에는 장애인의 날을 맞아 다양한 이벤트를 진행했는데요. ‘2026 선 넘는 페스티벌’에서는 ‘경계 없는 이동 경험’을 주제로 단독 부스를 운영해 휠체어 이용자들에게 PV5 WAV의 편의성을 알렸습니다. 경기도 평택에 위치한 PBV 익스피리언스 센터에서는 휠체어 이용자와 함께하는 참여형 프로그램 ‘무빙 캔버스-PV5 WAV와 함께하는 휠꾸(휠체어 꾸미기)’를 실시, 유튜버 ‘굴러라 구르님’과 함께 참가자들의 휠체어를 꾸미고 PV5 WAV를 시승하는 시간까지 가졌습니다.
아울러 지자체와의 협업도 확대합니다. 서울시 사회복지시설과 장애인 가족을 둔 시민을 대상으로 PV5 WAV 특별 구매 지원금*을 제공하며, 경기도·화성특례시와는 PV5 WAV 도입 및 운영 방안을 검토 중입니다.
*우측 스마트 파워 슬라이딩 도어 및 스마트 파워테일게이트 장착 비용 80만 원+전기차 충전비 20만 원.
PV5 WAV의 활약은 영국에서도 이어집니다. 기아는 지난해 11월 영국 최대 규모의 장애인 대상 리스 차량 운영사 ‘모타빌리티(Motability)’와 업무협약을 체결했습니다. 기아는 PV5 기본형과 PV5 WAV를 공급하고, 모타빌리티는 올해부터 이를 활용한 서비스를 선보일 계획이죠. 두 회사가 수집한 WAV 시장 관련 정보는, 기아가 향후 출시할 대형 PBV인 PV7의 WAV 모델 개발에 활용될 예정입니다.
트렁크가 아닌 옆문으로 당당히 들어서고, 가족과 어깨를 나란히 한 채 창밖을 보는 평범한 기쁨은 ‘기술이 사람을 향할 때’ 비로소 실현됩니다. PV5 WAV는 이러한 일상의 기쁨을 앞당길 수 있는 이동 수단으로 우리 곁에 다가왔죠. 보다 나은 이동의 자유를 향한 기아의 진정성 있는 도전은, 이제 전 세계의 도로 위에서 의미 있는 변화를 시작합니다.
사진. 이태권